Chapter 97
1.
존재성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우리 모두는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존재’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인식하고, 또 이해하게 된다.
눈앞에 있는 사람, 손에 잡힌 물건, 들려오는 노래 소리, 코로 흘러들어오는 향기, 입안의 음식까지. 사람이 보통 ‘존재’를 느끼는 것은 일차적으로 피상적인 감각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이 세상을 ‘실존한다’고 여기게 된다. 이것이 존재성에 대한 첫 번째 걸음이었다.
시간이 흘러, 인간이 지식이라는 탑을 쌓아 감각이 아닌 지식과 지혜로 감각 이외의 것을 탐구하기 시작하였을 때, 인간은 ‘존재’에 관한 새로운 지평을 열기 시작하였다.
피상적인 감상과 감각을 넘어, 추상적인 영역에 이르러 존재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존재성을 부여하는 것이 과연 감각 뿐일까?
그렇다면 일반적이지 않은 감각을 지닌 이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감각이 모두 거짓이라면?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생리현상, 세상 너머의 우주공간의 영역마저 모든 것들이 허상에 불과하다면?
인간이 지혜와 지식의 탑을 쌓아올릴 때마다 역설적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의심과 불신이 가득 찼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그 과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었기에.
아무것도 모르던 0의 순간을 넘어 1을 알았을 때.
인간은 2로 넘어가는 방법을 궁금해했고, 동시에 시작과 끝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생물의 본능적인 진화에 대한 갈망이자, 파멸에 대한 두려움이요, 또한 인간 특유의 호기심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물 본연의 원동력이라면, 미지(未知)에 대한 두려움은 지식인들의 원동력이었다. 그들은 지식의 길에 들어선 순간, 자신의 손이 닿은 이 탑을 드높이고자 열망을 불태웠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허상이라도,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부터 사람은 외면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내면에도 집중하게 되었다.
나 자신은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일상적으로 여기는 이 모든 것들은 무슨 이유로 탄생하여, 무슨 이유로 순환을 반복하고, 창조되었는가.
시작은 의문의 씨앗이었고, 종착지는 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의 선언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존재성의 본질은 우리의 생각이었다.
나의 생각이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존재하게 했다.
지식의 탑을 쌓아올린 한 존재는 존재성과 감각적 경험은 별개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경험을 한다고해서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라며, 존재성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생각에 의해서 분리된 관념이 일어날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라고.
어려운 말이다.
다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나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존재다.
그게 무엇인가? 이는 곧 의심하거나, 이해하거나,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욕구하거나, 욕구하지 않거나, 또한 상상하거나 느끼는 존재다”]
사람은 누구나 이성과 감정을 지니며, 욕구와 의심을 가진다. 이는 일반적인 사람의 ‘천성(天性)’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그 모든 번뇌와 감정, 그리고 이성 속에서 들끓는 광기 어린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존재성이었다.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
정의내릴 수 없는 우리의 머릿속 흐름만이 사람의 존재를 결정하는 유일한 척도였다.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 이건 확실하다.
그런데 얼마나 오래? 내가 생각하는 동안은 확실히.
왜냐면 내가 모든 생각을 멈출 때, 내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재성이란 추상적인 개념이다.
플라톤이 주장했던 ‘이데아’가 그러했듯, 존재성도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했다.
따라서 추상적인 개념의 상실은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물리적인 파멸이 아닌 인식과 이해의 소멸, 즉 생각의 단절이 그 사유라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멎고,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인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만인에게 나 자신의 존재를 알려 유명해진다?
미래를 대비하여 이 세계의 주역들과 많은 친분을 쌓는다?
…….
아마, 그런 방법은 아니겠지.
현재 내가 겪는 이 고민은 일종의 심마(心魔)였다.
나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해답을 내릴 수 있는건 오직 나 자신 뿐이었다.
타인에게 그 존재성의 증명을 전가해봤자 언젠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고민에 빠지겠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니 내가 해야할 일도 간단한 법이었다.
생각하자. 생각의 깊이를 넓히고, 지혜의 폭을 넓히자. 나 자신을 깊게 관조하고, 판단하며, 심판하자.
남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마찬가지로.
이것이, 내가 지식을 쌓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한 아이의 운명을 바꾸는 길과,
한 아이를 자신의 사정으로 외면하는 길.
빅시스터의 시선에 노출되더라도 운명을 비틀 것이냐, 혹은 빅시스터의 시선을 피해 숨어들 것이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정도로 깊은 고민이었다.
마음 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대립하듯 수없이 많은 의견들이 피어오르고 지길 반복했다.
이 또한 심마(心魔)였다.
마음 한켠에서는 모든 이야기를 개입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끓었고, 한켠에서는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없다는 이성적인 속삭임이 울려퍼졌다.
하여 지식을 쌓았다. 공부를 시작한 것은 어쩌면 그러한 고민을 해결할 방도를 찾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머릿속에 복잡한 내용을 쑤셔넣을 때면 이러한 고민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에.
다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외면할 생각은 없었기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보다 대체 어떻게 들어온거냐고…….”
“문이 열려있길래 들어왔죠.”
“그거 범죄 아니야……?!”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고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물어 무언가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다시 말씀 드릴까요?”
“…크흠! 조, 좋아.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했어. 그러니까… 결국 어떤 사건에 개입할지 말지가 고민된다는 이야기네?”
“대충 말하자면 그렇죠.”
느닷없이 창문으로 쳐들어온 나를 보며 허둥지둥대던 아루는 언제나 그렇듯 급히 평정심을 되찾곤 멋지게 폼을 잡으며 턱을 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긴 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험상굳은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는 아루였다.
물론, 원판 자체가 이뻐서 보기 좋았지만.
그렇게 아루가 고민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길 몇 분이 흘렀을까. 고민이 끝났는지 아루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한 아이의 인생을 바꾼다, 라……. 굉장히 흉흉하고 하드한 이야기네. 마음 같아서는 단순히 포기하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한 가지 궁금한게 있어.”
“뭔가요?”
“……무슨 근거로 아이의 인생이 바뀐다는거야?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거고?”
으음. 나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내 비밀을 다 이야기해야만 했기에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물음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기에.
우타하 또한 그런 말을 했었지.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언 능력을 가진게 아닌 이상 미래를 확정지을 수 없는거 아니냐면서.
내가 침묵하며 고민하는 보이자 아루가 잠시 당황하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무, 물론…!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그래도 바뀌기 전의 인생이든, 바뀐 후의 인생이든 그 아이가 행복하면 그만 아닌가……?”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개입하더라도 아리스의 운명이 바뀔 일은 없을지도 모르고, 더 나은 상황이 될지도 모르지.
히마리 선배도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아루가 답지 않게 똑똑한 말을 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도 있었지만, 아루의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사실 한 가지가 있었기에 나는 말을 잃었다.
이는 나의 근본적인 두려움이었고, 깨달음이었다.
“시, 실크……?”
현재 내 심마(心魔)의 근원이 된 이유를 기억한다.
벌처와의 싸움. 초감각을 극한으로 발현했을 순간의 관점을 기억한다.
아득한 성천의 영역까지 관점이 나아간 직후, 내가 문자 그대로 이 세상 모든 정보를 담았을 순간의 경험을 기억한다.
그리하여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불안한 곳입니다. 짐작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혼돈들이 가득한 장소죠.”
“……에?”
“저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수 있는 지반이나 다름 없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 그게 무슨…….”
그 깨달음의 이름은 두려움이었고, 절망이었다.
무수히 쪼개진 거품 속, 내가 살던 세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상들을 보았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운명’이란,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존재가 거품을 세상에 덧칠한 결과에 그치지 않았다.
거품이 터지고 부풀어오르는 순환 속에서 나는 무수한 죽음과 파멸을 보았다.
그 파멸의 원인이 아주 조그마한 혼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이 우주 너머에서 언젠가 찾아올 존재.
키보토스의 배후에 기거하는 괴이한 존재들.
그리고 한 소녀까지.
거품 속에 비쳐진 수많은 나.
그 안에서 어떤 자신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소녀에게 죽임을 당하고, 죽임을 행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 또한, 그러한 비극적 묵시의 결과로 나아가는 과정에 속해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깨달음이 나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두려움을 품자, 혼란이 일어나며 심마(心魔)에 빠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러니 나의 질문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으리라.
“세계의 종말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
역시나,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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