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eign Press Noona Is Obsessed with Me

Chapter 6



익숙한 복도를 통해 익숙한 정원을 지나 익숙한 교정을 걸어가고 있지만, 마음속을 가득 메우는 기대감만큼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 덕분일까,삭막하게 보였던 세상이 마치 오색찬란한 필터를 끼운 것처럼 보였다.

‘아니, 사실 이게 원래 모습이었겠지.’

지금껏 내가 회백색 색안경을 끼고 살아왔던 것이리라.

어제보다 더 새롭고 화창해진 교정을 거닐고 있자니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서!”

“안녕 레티.”

“아서, 너 어제 퇴학고지서 받았다면서.”

“…고지서까지는 아닌데…”

나는 레티에게 학장님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보여 준다.

“이번 실기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으면….퇴학?! 이거 퇴학고지서 맞잖아!”

…그래. 네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실기평가에서 낙제점 받는 건 이미 정해진 미래구나.

“이건 불공평해. 아카데미 규정상 퇴학은-”

“종합점수로 50점 미만. 하지만 학장님의 인장이 찍힌 이상 이미 결정된 사항일 거야.”

“학장’님’은 무슨. 그냥 학장이라고 불러. 대놓고 차별당하는데 존대를 왜 해?”

분명 교정 곳곳에 마이크가 달려 있을 텐데…?

나랑 나란히 퇴학당할 수도…

레티아 엘레노어.

엘레노어 변경백의 영애인 레티는 정말 우연히도 비슷한 취미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된 케이스다.

변경백이라는 직위를 가진 아버지를 둔 데다가 외형은 예쁘장하니, 학기 초에 상당히 많은 날파리가 꼬였지만….

그거 다 이 망아지 같은 이 녀석의 진짜 모습을 몰라서 그런 거다.

상판은 세상 순수한 요정같이 생겨 놓고는, 그 내부를 채우는 속은 영….

“이건 정식으로 건의해야 해. 아무리 네가 마력이 전혀 없다고 한들, 아카데미의 규정을 바꾸면서까지 퇴학을 시키는 건 대놓고 사심이 담긴 결정이잖아?”

실제로 우리의 학장님은 마력우월주의를 신봉하는 분이시다.

출석마저 마력 순으로 부르니 말 다 했지.(참고로 내가 가장 늦게 불린다.)

“됐어. 애초에 나랑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어. 퇴학 당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너 진짜 아서 맞니? 그렇게 근성 넘치던 아서는 어디 가고 이런 순딩이만 남아 있대?”

“순딩이라니…”

솔직히 조금은 놓아준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릴리스에게 부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릴리스는 무려 외신이다.

아무리 수준이 높다 한들 아카데미의 실기시험 따위, 외신의 가호면 눈 감고도 통과할 수 있겠지.

다만…

‘이미 너무 많은 걸 신세 지고 있단 말이지…’

신의 가호는 개나 소나 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 힘을 나눠 주는 것인데 어떻게 가볍게 나눠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릴리스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염치없는 거지.

당장에라도 학장실로 뛰쳐가려는 레티를 양팔로 구속하며 강의실로 향하려던 그때.

레티가 갑자기 내 옷깃에 코를 박았다.

“킁킁, 아서 너 또 안 씻고 나왔-…..어라? 네가 동거인이 있던가?”

“으, 응?”

“심지어…킁킁…………여. 자. 네?”

뭔가 마지막 말에 감정이 가득 실려 있다고 생각되는 건 기분 탓일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그걸 냄새로 알아맞춘다고?

“여, 여자는 무슨…내가 그럴 사람이 어디 있다고….”

말꼬리를 흐리는 나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는 레티.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네.

“아뇨?”

“거짓말.”

“아닌데요?”

“진짜 아냐?”

“…아냐.”

아, 순간 아침의 릴리스가 떠올라서 대답이 늦어지고 말았다.

“내 눈 보고 대답해.”

레티가 내 뺨을 붙잡고 정면에서 시선을 맞추었다.

“진짜로 아니야?”

“어이 잠깐, 이건 놓고…!”

“대답해.”

아니, 여기가 우리만 있는 곳이냐고!

남들 다 무슨 일인가 보고 있잖아!

“이렇게 여자냄새 잔뜩 풍기고 있는 주제에 뭘 발뺌을 하는거야.”

“아니,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대답해!”

이 녀석 진심이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이러고 있겠다는 투지가 눈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이렇게 된 이상 대답해 줄 수밖에 없다.

“가족이야.”

“…….예?”

“가족이라고.”

“에? 하지만 너…”

내가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레티는 당연하게도 내가 고아인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주변에서 그렇게 떠들고 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거지.

다만 나를 배려해서 지금껏 언급을 자제하고 있었다.

“…설마 입양된 거야?!”

“……”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레티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내 레티의 입꼬리가 쭉 올라간다.

“우와!! 축해해, 아서!”

내 일을 자기 일 마냥 기뻐해주는 그 모습은 이 녀석의 순수함을 보여 준다.

“그럼 이제 휴일에 나 말고도 같이 놀러 가 줄 사람이 생긴 거네? 여태 나 말고는 없었잖아.”

…음, 저리도 맑은 눈으로 팩트를 꽂아 넣다니 이런 정신 나간 친구가 다 있나.

“다행이다….정말로.”

그래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게 느껴져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 나도 이제 놀러 다닐 사람이 있으니까. 너도 나랑 놀아주겠다며 일부러 방학 때 남는 짓은 하지 마.”

“아, 알고 있었어?”

“변경백의 딸이라는 녀석이 방학 내내 아카데미에만 박혀 있는 게 말이 되냐?”

“에헤헤…”

멋쩍게 웃는 레티를 보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업이나 들어가자. 분명 첫 수업이….”

“대륙지리 수업.”

“아, 거기 교수님 빨리 들어오시는데.”

“지금 시간 넉넉….어라?”

옆에서 들여다본 레티의 회중시계 시침은 정확히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망했네.”

—-

같은 시각, 마도 제국과 국경을 맞댄 성국.

성국이라는 이름답게 이곳에는 대륙 최고의 성지인 만신전 판테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 대륙에서 섬기는 모든 신들을 한 자리에 모아둔 이곳은 매일토록 각자 다른 교단에서 나온 성도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서 딱 봐도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새까만 로브로 온몸을 싸맸지만 기다란 머리카락은 눈치 없이 로브 아랫자락에 삐져나와 있었다.

“만신전이라. 하여간에 이렇게 쓸모없는 짓을 하는 종족은 전 우주에 찾아봐도 손에 꼽을 거야.”

화려한 만신전의 입구를 힘을 주어 밟아간 릴리스는 쭉 나열해 있는 석상들을 훑어보았다.

“그래도 이 우주에 어떤 신이 있는지는 알아 둬야겠지.”

이른바 사전 조사다.

“흠…아우터 갓은 없네. 일부러 뺀 건가? ….음?”

신들의 면면을 훑어보던 릴리스의 시선이 문득 한 곳에 머문다.

흰 머리에 긴 수염과 대비되는 근육질 몸을 한 노인의 석상. 석상 아래에 달린 황금 패에는 노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위대한 심연의 군주이자 신의를 지키는 오래된 신. 노덴스.’

“하! 신의를 지켜? 노덴스가? 차라리 얌전한 쇼거스가 더 현실성 있겠네.”

깊게 푹 눌러쓴 로브의 틈새로 사이한 붉은 안광이 새어 나온다.

“이 녀석만큼 신의와 거리가 먼 신은 없을 거다.”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릴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나도 몰랐으니까….”

눈앞에 아른 거리는 번갯불에 머리까지 아파오자 릴리스는 발걸음을 돌렸다.

“언젠가는 그대로 돌려줄 날이 오겠지.”

—-

“너 때문에 늦은 거야.”

“뭐래. 누가 얼굴째로 붙잡아놨으면서.”

결국 수업 시간에 늦은 우리는 사이좋게 강의실 뒤편에 서 있었다.

“거기! 늦었으면 죄송한 태도라도 보이세요!!”

짜리몽땅한 지리 교수님이 꽥꽥 거리는 소리로 외친다.

“죄송함다~”

설렁설렁 답하는 레티를 본 나는 기가 찬 나머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그럼, 수업 재개하겠습니다. 에…이 대륙은 총 5개의 세력이 각자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있는 마도제국, 옆 나라 성국, 산맥 너머에 있는 대부족….”

“야, 아서.”

수업에 집중하려 하니 옆에서 방해 공작이 들어온다.

가볍게 무시했더니 옆구리에 쑤셔 박히는 충격.

“끕…”

고통의 신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레티를 홱 돌아본다.

“너…!”

한마디 따지려는 내 입을 레티가 틀어막았다.

“읍! 읍!”

“닥치고 들어봐. 내가 아주 기깔나는 소식을 들고 왔으니까.”

어디 한번 들어 보자 식으로 째려보고 있자 레티는 어떤 종이를 주섬주섬 품에서 꺼냈다.

“이거 봐봐.”

내 눈앞에 들여진 그것에는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상하좌우 전부 돌려 봐도 직사각형만 보이는 직육면체.

3면은 다른 재질로 덮여 있고, 다른 3면은 속살을 전부 내어보이는 형태의 그것.

“…책이네?”

“응, 책이야.”

책이었다. 하지만 결코 평범한 책이 아닌, 표지에서부터 불건전한 오라가 풀풀 풍기는 요사스런 책.

“또 뭔데.”

“듣고 놀라지나 마셔. 이건 무려 러브러브 크래이플의 사라진 초판본이라고!”

곧장 내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작가의 이름이 안 좋은 의미로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게 내가 변경백 따님과 친해질 수 있었던 계기였다.

그냥 귀족도 아닌 변경백의 아래에서 자란다는 것은 그 특이한 귀족 사회에서도 평범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다.

지금처럼 타국과의 사이가 괜찮다면 모를까, 딱 20년 전 성국과 전쟁 직전까지 갔었던 시절에는 매일이 전시 태세였을 테니까.

그나마 사이가 완화된 지금도 딱히 편안한 삶은 아니었겠지. 그런 배경이 있던 탓일까.

내 눈앞에 있는 변경백의 딸내미는 약간은 특이한 취향이 있었다.

그 취향이란 건 바로…….이상한 서적 수집.

여기서 ‘이상’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그저 그런 고서부터 시작해서, 희귀한 초판본이나 한정판, 신기한 마법이 담긴 스크롤, 심지어는…..야설까지.

“…너 이거 아버지가 아시면…”

“에이 그럼 배 째고 드러누우면 돼.”

…음, 간덩이가 부었군.

“이 작가 책이면….이번에도 야설이야?”

“그냥 야설이 아니야. 엄청 희귀하고 개꼬……아무튼 대단한 책이라고!”

얘가 방금 뭐라 말하려고 한 거지…?

“이게 어디 있는데?”

“아카데미 도서관에.”

…이놈이 지금 무슨 말하고 있는 거야?

나와 레티의 신분격차를 생각하면 아무리 취미가 비슷하다고 한들 쉽게 친해지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도서관에는 이런 책 없어. 있었으면 내가 진작에 너한테 보여줬겠지.”

내가 아카데미 도서관 죽돌이기 때문이다.

학기 초에는 아예 숙식을 거기서 해결할 정도로.

이전 고아원에서는 독서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한동안 책에 빠졌던 것이다.

몇 달을 도서관에서 보내자 거기 있는 책의 제목 정도는 전부 알게 되었다.

읽지는 않아도 책등은 전부 봤으니까.

덕분에 책을 찾던 레티를 도와주며 친해지게 된 것이다.

장르는 다를지언정 책을 좋아하는 건 같으니까.

하지만 저런 책은 기억에 없는데…

“후후훗.”

“…뭐냐 그 변태 같은 웃음….아, 너 변태 맞지.”

“뭐래, 책벌레가. 아무리 너라도 모르는 곳이 딱 한곳 있잖아?”

“…설마 금지구역?”

“후후후후.”

“난 빠진다.”

“아, 왜~”

“너 진짜 미쳤어? 거기 몰래 들어갔다가 걸리면 바로 정학 내지 퇴학이거든?”

“몰래 라니? 합법적으로 들어갈 거야.”

“뭐?”

“사서쌤한테 퇴학 당하기 전 마지막 부탁이라고 빌면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퇴학 당하는 건 이미 확정된 거구나?”

진짜 너무하네…

“너 사서쌤하고 친하잖아. 한번 부탁드려 봐.”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건 좀…”

“제발. 내가 무릎 꿇고 부탁할게. 이거 이제는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책이란 말이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티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회피하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금지구역이라…’

언젠가 한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그곳.

학생들 수준에서는 다룰 수 없는 위험한 주문과 저주가 담긴 책이 봉인된 곳이라 한다.

‘혹시 모르지, 마력을 얻는 방법이 쓰인 책이 있을 수도?’

…라곤 하지만 솔직히 레티의 부탁을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지만.

매몰차게 거절하기에는 내가 신세 진 게 너무 많았다.

“알겠어. 한번 해볼게.”

“꺅! 아서, 넌 최고야!”

-휘리릭, 딱!

환호성을 지르는 레티의 이마 정중앙으로 분필이 날아와 꽂힌다.

“아얏!”

“…레티아 학생.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같이 가시죠.”

서슬 퍼런 선생님의 말에 레티는 그제야 나에게서 떨어졌다.

수업은 재개되었지만 금지구역에 갈 생각에 머리가 잔뜩 복잡해진 나는 결국 수업을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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